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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04 02:56

듣게 하소서 - 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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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게 하소서 - 이해인



주여, 나로 하여금
이웃의 말과 행동을
잘 듣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내 하루의 작은 여정에서
내가 만나는 이의 말과 행동을
건성으로 들어 치우거나
귀찮아 하는 표정과 몸짓으로
가로막는 일이 없게 하소서
이웃을 잘 듣는 것이 곧 사랑하는 길임을
내가 성숙하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이기심의 포로가 되어
내가 듣고 싶은 말만 적당히 듣고
돌아서면 이내 잊어버리는 무심함에서
나를 구해주소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못 들은 척 귀막아버리고
그러면서도 '시간이 없으니까'
'잘 몰랐으니까' 하며 핑게를 둘러대는 적당한
편리주의, 얄미운 합리주의를 견책하여 주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주어진 상황과 사건을
잘 듣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앉아야 할 자리에 앉고
서야 할 자리에 서고
울어야 할 때에 웃고
웃어야 할 때에 웃을 수 있는
민감하게 듣고 순응하는
삶의 지혜를 듣게 하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자신을 잘 듣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나를 잘 듣는 사람만이
남을 잘 들을 수 있음을
당신을 잘 듣을 수 있음을
거듭 깨우치게 하소서
선한 것을 지향하는 마음의 소리를
잘 듣기 위해
침묵과 고독속에
자신을 조용히 숨길 줄도 알게 하소서

나는 두귀를 가졌지만
형편없는 귀머거리임을 몰랐습니다.
사람과 사물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말만 많이 했음을 용서하소서
들으려는 노력도 아니하면서
당신과 이웃과 세상에 대해
멋대로 의심하고 불평했음을
지금은 뉘우칩니다.

매일매일의 내 작은 여정에서
내 생애의 큰 여정에서
잘 듣고 잘 말하는 이가 되도록
밝고 큰 귀와 입을 갖고 싶습니다.
언제나 이웃을 위해
마음의 귀가 크게 열려 있는
성인들의 사랑을 본받고 싶습니다.

말소리만 커지는 현대의 소음과
언어의 공해 속에서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겸손히 듣고 또 듣는
들어서 지혜를 깨우치는
삶의 구도자 되게 하소서.



----------------------------------------------------------------------


이해인



부산 성 베네딕도회 수녀로서, 필리핀 세인트 루이스 대학 영문과를 거쳐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했다. 시집으로 <민들레의 영토>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등이 있으며, 동시집 <엄마와 분꽃>. 시선집으로 <사계절의 기도> <다시 바다에서>, 산문집으로 <두레박> <꽃삽> <사랑할 땐 별이 되고>가 있다. 제9회 새싹 문학상과 제2회 《여성동아》대상, 부산여성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수녀시인 '이해인'님의 팬페이지 -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  http://www.mypo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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