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그림자 - 윤동주(尹東柱)
황혼이 짙어지는 길 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 검의 옮겨지는 발자취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와 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 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 보낸 뒤
허전히 뒷 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젖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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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尹東柱) / 1917∼1945
시인. 아명은 해환(海煥). 북간도의 명동천에서 출생. 연희 전문을 졸업하고,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같은 해 가을 도시샤 대학 영문과로 전학하였다. 1937~1938년에 <카톨릭 소년>지에 [병아리] [무얼 먹고 사나] [거짓부리]등을 발표하였고, 연희 전문 재학 시절에는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 일보>학생란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발표하였다. 1943년 친우인 송몽규와 함께 귀국하다가 독립 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잡혀 일본 후코오카 형무소에서 복역 중에 옥사했다. 그는 일제 암흑기 저항 시인으로, 고고하고 준열한 민족적 서정시를 썼다. 사후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발간 되었고, 그 밖의 작품으로 [서시] [십자가] [자화상] [참회록] [별 헤는 밤]등이 있다.